한국 남녀간의 르완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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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르완다'라는 ㅆㅅㅌㅊ 영화 덕분에 다들 알고 있는 르완다 내전.
인종청소라는 말에 걸맞는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으나 동시에 지금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매우 안정된 정치 사회 환경을 갖고 있으며 내전의 상처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르완다 내전은 (재미있다고 하면 좀 그렇지만) 배울 점이 아주 많은 사례이다.

1. 식민지 시절의 분열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2. 학살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3. 그리고 내전을 겪은 나라가 어떻게 안정을 되찾아나가는가

이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르완다에 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의 가운데에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풍요로운 수자원과 비옥한 토지 덕분에 농업과 목축으로 매우 잘 살던 지역이었다.
한편 아프리카 대륙 식민지 확보에 뒤늦게 뛰어든 벨기에는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호텔 르완다에서도 나오지만,
르완다 지역에는 크게 두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투치족과 후투족이다.
벨기에인들은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투치족은 키가 크고 코가 높으며 피부색도 덜 검었다. 게다가 투치족은 서양인들이 전파한 카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벨기에인들에 대한 반감이 적었다. 또한 후투족에 비해 수가 적었기 때문에 외세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그래서 벨기에인들은 투치족을 우대했다.
반면 수가 많았던 후투족은 벨기에인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빼앗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




벨기에인들이 철수하면서 르완다는 독립을 찾았다.
후투족은 투치족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정치 권력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민주주의는 결국 쪽수가 많은 쪽이 유리한 제도라서 후투족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치족이 벨기에인들과 친했던 것처럼 후투족은 (벨기에와 경쟁하던) 프랑스인들과 친했다.
독립 후에도 후투족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친불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민주주의를 무슨 다수가 떼 쓰면 통하는 씹미개한 정치제도라고 알고 있는 후진국 국민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후투족도 사유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했다.
대신 그들은 정치 권력으로 투치족이 가진 부를 빼앗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당시 JTBC 싸대구 후리는 선동으로 악명을 떨친 방송사가 바로 RTLM(Radio Télévision Libre des Mille Collines)이다.
 






1994년,
후투족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쥐베날  하뱌리마나(Juvénal Habyarimana)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후투족 과격파가 득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과격파와 RTLM에게 조종받던 후투족 민병대인 인터함웨가 학살을 저지르면서 르완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의 유명한 슬로건은 "무덤들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이다.





약 석달간 투치족 수십만명이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투치족과 친하던 후투족도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학살당했다.
일반적으로는 식민 지배에 협력한 투치족에 대한 증오로 학살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당시 후투족은 투치족을 죽이면 그 재산이 자기 것이 될 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돈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한편 후투족의 보복을 내다보고 미리 수도를 떠난 투치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호적인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것이 르완다 애국전선(RPF)으로 알려진 무장조직이다.
RPF를 조직한 투치족들은 자기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독립국가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1994년에 대학살이 벌어지자 이제 RPF와 후투족의 충돌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녹색이 후투족 지배 지역, 파란색이 RPF 지역. 르완다 수도는 키갈리)






한편 투치족을 이끄는 인물이 ㅆㅅㅌㅊ였다.
바로 폴 카가메 현 르완다 대통령이다.






폴 카가메의 RPF는 수는 많지만 오합지졸인 인터함웨와 후투족 장군들을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후투족을 지원하던 프랑스 정부가 국제사회의 압력에 못 이겨 후투족 지원을 철회하면서 군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폴 카가메는 1994년 7월18일, 르완다 수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르완다 내전은 아프리카의 내전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아주 '깔끔하게' 끝난 내전이다.
투치족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르완다가 내전 직후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비결도 간단하다. 투치족이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반란의 불씨가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폴 카가메라는 ㅆㅅㅌㅊ 지도자의 능력 덕분이었다.
폴 카가메는 르완다의 대통령에 취임했고 그는 지금까지도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카가메가 장기집권을 하는 독재자라고 하지만 르완다에 카가메 만한 인물이 없는 게 사실이다.









지금 한국을 보면
여가부라는 조직이 남자와 여자들을 이간질 시키고 있다.
누가 투치족이고 누가 후투족인지는 입씨름 할 필요는 없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자기들이 투치족 입장이라고 할 것이니까.









하지만 르완다 내전은 한국인들에게 여러 교훈을 준다.
우선,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든, 내전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여자들에게 조금만 양보하자? 선진국에서는 다 페미니즘을 하니까 남자도 특권을 포기하자?
페미나치들이 그 정도로 만족할까? 
더구나 여가부에서는 지금도 여자들이 피해자이고 남자들을 억압함으로서 여자들이 꿀빨 수 있다고 선동하는데?


르완다 내전의 두번째 교훈,
내전에서는 반드시 압승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해는 적을 완전히 제압한 다음에나 생각하는 것이다.
카가메는 후투족에 대해 사면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터함웨의 지도자들을 법정에 세운 이후였다.


RTLM의 선동가들 또한 법정에 섰다.
RTLM의 설립자 하산 은게제(Hassan Ngeze)는 35년형을 선고받았고


캐나다로 '망명'을 시도했던 RTLM의 저널리스트 레온 무게세라(Léon Mugesera)는 결국 무게세라의 르완다 학살에서의 선동을 한 죄가 인정되어 캐나다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르완다에 강제 귀국을 당한 그는 공항에서 체포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여가부의 탈레반 싸대구 후리는 독재를 보면서 자기들 세상이 온 줄 아는 보지년들도 있을 것이다.
투치족의 재산을 노리고 학살을 저지른 후투족처럼 머리 나쁜 김치년들일수록 개지랄들을 하겠지.
게이머의 애를 임신했는데 중절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이 성괴 레이싱걸년처럼.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여가부라는 썩은 고름을 뽑아내기에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카가메 대통령은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르완다에서 부족간 증오를 부추기는 세력을 일망타진했고 그 결과 르완다의 뿌리깊은 같은 부족 출신을 챙겨주는 폐쇄적인 문화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자가 많이 죽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르완다에서는 여성이 남자들과 똑같이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결과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다.
대부분의 현대화를 이룩하려는 국가들이 서양 언론에 잘 보이려고 정부 주도로 여성을 기용하는 척 하다가 마는 것과 달리
르완다에서는 여자 남자 할 거 없이 경쟁을 시킨다. 당연히 여자라고 특혜를 주는 일은 없다. 
르완다의 성평등지수가 높은 이유는 (물론 그 성평등지수라는 게 사회진출 많이 하면 무조건 점수 많이 주는 병신같은 인덱스이긴 하지만) 르완다 내전 때문에 남자가 급격히 줄어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보지년들 해외연수 많이 가잖아. 그런데 남녀평등을 정말로 배우려면 르완다에 가서 배워와야 하는 거 아님?
그런데 김치년들이 르완다 가지 않는 이유는 일단 해외연수를 빙자해서 관광 가려고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르완다의 성평등은 여성이 특혜를 거부하고 남자들과 똑같이 땀을 흘리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임.
르완다에서 젠더학 같은 병신같은 말장난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남자들처럼 생업에 필요한 학문 배우기도 바쁜데.
  







마지막으로...
카가메 대통령도 문재인은 걸렀다.






한줄요약: 여가부를 철저히 박살낸 끝에야 진정한 성평등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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