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최고의 예술가이자 최악의 군주인 송휘종!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북송의 8대 황제인 휘종이다.

故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이나 '수호지'를 보면 휘종은

희대의 멍청이에 망나니로 묘사된다. 송휘종이라는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의 캐릭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송휘종은 명필이였다.

그가 고안해낸 고유의 필체인 수금체(瘦金體)

자획을 길고 가냘프게 뽑아낸 것이 그 특징이다.

글씨에는 개인의 성품이 반영된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로 그런 것일까?


또 화가로서도 출중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단순히 황제의 작품이라서

인기를 끌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작품을 감상해보자.


동양화를 전공하는 미대생이 보더라도 감탄할 만 하다.

송휘종은 미술을 사랑하여 재임기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 중에는 시대를 앞서나간 작품들도 있었다.


서학도(瑞鶴圖)

구도와 기법 모두 정교한데 전통적인 화조화(花鳥畵)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하늘에 가득한 학들을 그리고 그 밑에 궁전지붕을 그려 학을 돋보이게 하였다.

대담한 시도라고 평할 만 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학들은 각양각색이고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학이 없다. 화면이 활발하게 구성되어있다.

 
휘종의 음악사랑

고금(古琴)을 연주하고 있는 휘종과 감상 중인 고관대작들.

이처럼 송휘종은 예술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만큼 문예의 보호와 육성에 열성적이였으며 한림원의 서원과 화원제도를 정비하고

서화가들의 처우를 개선하였다. 숭녕 3년(1104)에는 서화학을 개설하기도 했는데

입학시험 문제를 직접 출제하고 제작을 지도편달할 정도로 열정적이였다고 한다.


"꽃을 밟고 돌아섰더니 말발굽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화제(畵題)로 시험을 치렀더니

모두가 멘탈이 나가있을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의 뒤를 쫒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휘종 재임기의 일화다.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의 뒤를 따르는 나비떼는 정형화된 구도가 되었다.


고려의 공민왕도 그림을 잘 그렸다. 상단의 그림은 공민왕이 남긴 이양도(二羊圖)다.

당시 한반도는 고려 인종 재임기였는데 휘종은 고려에서 온 화가 이령(李寧)의 솜씨를 극찬하며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이령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하고 이령에게 고려 예성강을 그리라고 했다.

이령은 분부대로 예성강도를 그려서 바쳤는데 이를 감상하더니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들이 많았지만 그대의 솜씨가 가장 출중하다."

라고 감탄하고 술과 음식, 화려한 비단옷,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실제로 휘종은 송나라의 문화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 시기에 중국 문화의 레시피가 완숙해졌으며 많은 걸작들이 탄생했다.

문화국가의 창달이라는 면에 있어서 휘종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하겠다.

우선 휘종 본인부터 '풍류천자'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전부 낙제점이였다.


송휘종은 일생 경박하게 살았다.

황제로서 재임하고 있는 동안에 한 일이라고는

축국(공놀이)과 주색잡기, 예술 뿐이였다.

실제로 송휘종의 후궁비빈은 구름처럼 많았고

각종 여자들이 휘종의 환심을 사고자 아양을 떨었다.

그 결과 휘종의 자녀는 80명 이상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원의 장식용으로 사용된 기암괴석

그리고 진귀한 예술작품이나 골동품 및 수석(壽石)을 모으는 수집벽이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국고를 거덜내게 된다. 고귀하신 황제께서 예술을 즐긴다는 명분으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착취하고 새로운 정원을 꾸며야된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부과하여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통해서 기암괴석을 운반하게 했는데

도중에 집이 있으면 그 집을 뭉개고 운반하는 것이 예사였다. 

(기암괴석을 실고 가는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죄인이 되어서 도망다니는 게 수호지의 양지다.)

워낙에 돌을 실고 다니는 배가 많아서 아예 화석강이라는 이름이 붙을 지경이였다.

정강의 변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휘종은 그 때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시켜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결과 송나라의 국력이 대폭 깍여나가게 된다.

그리고 북방의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에 의해서 한족의 왕조인 송나라는 멸망 테크를

밟게 되는데 예술에만 뛰어난 역량을 가졌을 뿐 정치나 전쟁, 행정같은 일에 무지했던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며 휘종이 일생동안 수집한 

모든 금은보화, 서화작품, 골동품, 서적 등도 전리품으로 금나라에 압류당하고

휘종의 많은 처첩과 딸들도 전리품으로 금나라의 첩이 되거나 기생으로 팔려나갔다.

드라마 '정충 악비'에서는 이 판국에도 아름다운 돌과 그림만 챙기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는데 금나라 장수 올출이 그 돌을 황하에 전부 내던지고 그림은 불살라버린다.

북송의 왕선이 남긴 "눈내리는 어촌마을"

이같은 송휘종의 캐릭터에는 그가 아버지처럼 따른 북송의 서화가 왕선의 영향이 컸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단왕 조길(송휘종)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고모부인 왕선을

흠모하고 그의 모든 것을 복사판처럼 따라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왕선이라는 인물이

어떠한 인물인가 하면 금기서화(琴棋書畫)에 두루 능하며 한 번 읽은 것은 결코 까먹는 법이

없을 만큼 문예적인 소질이 출중한 재자(才子)이자 특히 그림을 잘 그리는 인물인데

문제는 사치스럽고 여색을 밝힌다는 것이다. 

영화 '금병매' 中

왕선은 자신의 재능과 라이프스타일을 따르고자 한 처조카에게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다. 

금기서화 뿐만이 아니라 주색잡기, 유흥, 침대에서 어떻게 해야 여자를 홍콩 보낼 수 있는지 등.  

이러니 휘종은 청소년기부터 고리타분한 학문보다 계집을 좌우에 끼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기에만 바빴다. 나중에 차기 황제를 지목할 때도 이를 알고있었던 신하들은 이 분은

성품이 너무 가볍고 노는 걸 좋아해서 황제로는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는데 

상태후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휘종은 평소 행실이 어찌 되었건 상태후를 뵐 때는 항상 예의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했으며

상태후은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 휘종을 좋게 보았다. 이후 황제를 지목할 때 재상이였던

장돈과 논쟁을 벌였는데 장돈은 

"조길은 성숙한 정치가가 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라고 반대하였으나 상태후는 

"이 아이의 인물이 단정하고 멋쟁이인데다가 재주도 출중하다.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

라는 말로 휘종을 옹호하였다.

결국 상태후의 주장에 가신들이 합세하면서 송휘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렇게 따지고보면 상태후야말로 북송 멸망의 원흉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수 없다.


물론 황제라고 해서 취미생활을 즐기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은 명나라의 선덕제인데 재임기에 사냥도 좋아하고

귀뚜라미 싸움이라는 희한한 취미생활도 즐겼으며 명필인데다가 그림에도 능숙했다.

선덕제의 그림

선덕제의 그림에는 "모월 모일 심심해서 그려봤다."는 식으로

자신의 그림을 낙서 수준인 것처럼 표현한 문구들이 있는데

그 그림이 송휘종과 쌍벽을 이룬다.

할아버지인 영락제가 활발한 대외원정으로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였다면 선덕제는 내치에 올인하여 문화융성을 구현하였다.

실제로 명나라의 황제들 중에서 선덕제를 제외하고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검약한 성품으로 궁을 사치스럽게 꾸미지도 않았고

지나친 진상 역시 금지하였다.


그러나 송휘종은 대국적인 국가 경영 측면에서의 문화융성, 문화국가의 창달이 아니라

그저 본인의 취미와 사치를 위해서 권력을 남용하였고 제국의 부를 탕진하였으며

기어이 북송을 멸망케 하였다. 황제가 되지 않고 그냥 예술가로만 살았더라면

송나라 최고의 예술가로 높은 평가를 받았을 인물이고 요즘식으로는 문화부 장관 정도는

해도 될텐데 하필 황제가 되는 바람에 자기 자신과 국가를 망쳐버린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한줄평

직업을 잘못 선택하면 개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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