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체, 무솔리니 - 2부작 - ( 제 2 부 ) [레벨:5]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 ( 39세 ) 라는 타이틀과 함께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건설하게 된 두체는
본격적으로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이탈리아 통일 사회당의 떠오르던 눈, 마테오티 의원을 암살하고
  15세의 무정부의자인 소년이 두체의 자동차에 총격을 가한 사건을 빌미로
  공산주의를 탄압, 폭력과 위협으로 파시스트 1당 체제를 구축하였다 )

< 게이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파쇼는 이탈리아어로 '전체' , '무리' 라는 뜻으로
   파시즘은 전체주의의 틀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 좌우의 개념이 아니라 )
   파시즘 이념의 창시자는 무솔리니가 아니라 '지오반니 젠틸레'라는 작자고
   두체는 파시즘 국가의 창시자이다.
   젠틸레가 사회주의자였기에 그 기원을 좌익 계열의 사상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파시즘 이념 자체가 극우냐 극좌냐 하는 논의는 사실상 의미없는 분쟁이라 할 수 있겠다 -

" 파시즘은 이탈리아 국민 생활에 조화를 가져다주는 자이자, 동시에 통치자다 " 라는 두체의 말처럼 >


( 그리스 - 코르푸 섬 )

1923년에는 국제 연맹의 나약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력 행사를 통하여 그리스 영토내의 코르푸를 점령하였으며,


아프리카 국가인 리비아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 하지만 창과 칼을 들고 덤비는 리비아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막상막하, 용호상박의, 
  세기의 결전을 치루었다 - 한감 동맹 든든하다 이기야 - )

- 월드컵을 개최해 놓고는 상대편 선수들을 총으로 협박한 제국의 수준 ㅇTㅇ -

< 나의 식민지 정책은 나의 외교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의 미덕과, 세계대전 전후로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대륙 전 지역의 개발을 위해
   우리나라가 제공한 훌륭한 인적 요소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식민지를 경영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개발은 단지 인구문제의 논리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우리 경제 상태에 대한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10년이 지난 뒤에조차 우리나라의 경제 상태는 충분한 해결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다 >


- 윗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체는 식민지 개발을 통한 경제 영토 확보를 염두에 두고,
  아프리카와 그 사이에 있는 지중해의 장악을 노리고 있었다 - 

( 무솔리니가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해서 그의 외교적, 경제적 성과까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은 아니다.
  반공 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영국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의 재무장과 오스트리아 병합을 견제하기도 했다.
  영국과의 갈등을 방지하고자 군축 회담에 적극 참여하여 다른 유럽 국가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고.
  아무튼 중립을 지키면서도 히틀러처럼 무모하게 나서지는 않되,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실리를 택했다.
  이탈리아의 공업 수준과 해 공군력은 두체 정권 기간 중 이전과 비교해 크게 높아졌으며,
  마피아를 전땅크처럼 살벌하게 쓸어버리는 업적도 남겼다. 
  문제는 단기간의 졸속한 재무장일 뿐이라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으며
  국가의 전체 경제력이 상승했을 뿐, 빈부 격차는 전보다 심해졌다는 것,
  병사들과 국민들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에는 관심도 없을 뿐더러 
  무기력한 의지 빈약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거다 )



 

( 그래서 주로 원시적인 만만한 애들만 노렸다 )

1935년에는 50만의 병력으로 에티오피아를 무력 침공하여 점령했고  
스페인 내전에 끼어들어 반공주의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원하는데 국가 예산의 1/9를 날려먹었다.
( 정작 건진 건 없었다. 프랑코는 유럽 전쟁에 개입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기에
  그저 잘 이용해 먹었을 뿐 )


이런 식으로 주변 국가에 대한 잦은 무력 침공과 불법적인 내전 개입으로
유럽 각국은 이탈리아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에 더해, 설상가상으로 본인들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이유로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자,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되었다.
( 그러나 애초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먼저 뒤통수 친 건 영국이었다.
  독일의 영토 반환 요구를 들어주고 양국 간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했다 )


   
( 1936년 10월 - 反 코민테른 협정 -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의 국제 공산 기구라고 보면 된다 - )

붉은 군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반공 전선을 명시적 조약으로 구축한다.



  


( 두체는 반공과 서방에 대한 대비책으로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이미 이 때부터 일본, 독일과의 운명 공동체는 결정되어 있었다 )



( 1938년 9월 독일 뮌헨. 왼쪽부터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협정 조인자들 )

오스트리아를 삼킨 걸로 모자라 체코까지 병합하려 했던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 체코의 싸대기를 후려치고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무솔리니는 괜한 전쟁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막고 어부지리를 얻기 위해
회담을 중재하였으나, 역시 이번에도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협정을 파기, 체코를 꿀꺽한 후
소련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히틀러는 1939년 09월 0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동유럽에서의 소련과 연합 전선을 유지한다.

눈치 살피며 중립을 지키고 있던 두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이 독일의 전격전에 어이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 떡고물이라도 얻으려면 지금이 기회 " 라는 마인드로
독일에게 가담, 프랑스 남부를 공격하지만 또 패배하여 
이탈리아군이 얼마나 병x인지를 증명하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승전의 시류에 합류해보려 했던 그는 독일, 일본과 삼국 동맹을 체결한다.

( 1940년 09월 삼국 동맹 조약 조인식 ) - 추축 동맹 -





( 1941년 12월 07일 일본군의 기습 공습을 받은 하와이 제도 진주만 )


( 1941년 6월 22일 독소 전쟁 발발 )


그저 유럽에서의 작은 영토와 북아프리카의 식민국 건설에만 관심있던 무솔리니는
연이은 동맹국들의 소련, 미국에 대한 공격에 기겁을 하고.




또 주제를 모르고 이집트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침공한 무솔리니는
예상대로 오히려 자신이 침략당하는 처지가 되어 독일군에 도움을 요청,
히틀러는 지중해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사막의 여우 롬멜과 기갑사단을 파견해 이탈리아를 지원한다.

이어지는 연속된 패배와 전쟁의 후유증은,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反무솔리니 세력을 결성하게 만들었고 
결국 에마누엘레 황제는 그를 해임하고 가택 연금시킨다 - 1943년 -



( 오토 슈코르체니 )

독일 공수부대장인 슈코르체니의 낙하산 부대에게 구출되어
북부 이탈리아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지만,
더 이상 그에겐 전쟁과 권력에 대한 흥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무솔리니는 매일 매일을 술과 모르핀 중독이 되어 보냈고,
연합국에 의해 이탈리아가 완전 해방을 맞이하자
연인인 클라라와 함께 중립국 스위스로 도주하려다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 1945년 04월 28일 -

( 이는 히틀러가 자살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





( 처형당한 뒤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와 그의 연인 클라라 페타치.
  그를 감싸다 함께 벌집이 되어 사이좋게 갔다고 한다 )

-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거의 안면 장애 다운 증후군처럼 보이는 사진도 있으나
  올리면 짤릴 거 같으니 알아서 찾아보기 바란다 -






- 히틀러와 달리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두체를 악인이나 학살자로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편이다 -



이탈리아에 현대판 로마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야심가. 두체, 무솔리니.

하지만 그의 위대한 야망을 떠받들어 줄 다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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