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륙 진출? 그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세계의 문명권을 9개로 구분한 지도다.

이 지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만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게 전근대 중국의 세계관이다.

중원을 중심으로 해서 몽골, 신강, 티벳은 변경.

그리고 조선, 월남(베트남), 류큐(現 오키나와)는 중화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 외의 국가들은 외국으로 분류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오랑캐라는 뜻인데

일본 역시 이같은 중화의 질서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있었다.



조선, 월남, 류큐는 중국에 조공책봉을 했다.

말 그대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것. 말하자면 중국 천자로부터

임명을 받아야 정통성이 확립된다는 것이다. 대신 조공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뜯어간 것은 아니고 조공을 받으면 그 답례로 더 많은 하사품을 내려야 했다.

일단 큰형님의 체면이라는 것도 있고 하니까 조공을 받으면 그만큼 은화로

값을 후하게 치루어주었는데



그 때 사용된 은화가 이것이다. 은자(銀子)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전근대 중국의 화폐는 은이였다.

아무래도 금보다는 은이 흔하기 때문에 은으로 값을 치루어주었는데 자신의 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행렬이 빈번할수록 국고의 손실이 심각해져서 나중에는 무역적자를 이기지못하고 국운이 기울기도 했다.



이렇게 은화를 사용하던 중국 덕분에 전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몰려들었고



이와미 은광

은이 아시아 무역의 기축통화가 되고 때마침 이와미 광산에서 은이 채굴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중국의 선진 상품을 수입하여 상업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이 아시아 무역에 참여한 이후에는 이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됨이 따라 유럽의 지식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한마디로 은은 현재의 일본을 가능케 한 혈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중국은 아랫것들에게 옥새를 하사했는데 거북 모양에 금으로 만든 물건을 하사했다.

말 그대로의 옥새, 즉 옥으로 만든 도장은 천자(天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유는 당시에는 금보다 옥이 더 값진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자가 사용하던 옥새(玉璽)



일본 황실 문양

반면 일본은 이러한 중화의 질서랑 무관한 나라였기 때문에 내내 따로 놀았다.

중국과 조공책봉을 하는 국가가 아니였기 때문에 중국이 왕한테 천자(天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처럼 일본은 덴노, 천황(天皇)이라는 독자적인 칭호를 고수했고

역사 내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중국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유럽과 같은 봉건주의 사회였다.

말하자면 영주가 각 지역을 관할하는 연합체같은 성격의 국가였다는 말이다.

이같은 봉건주의의 전통은 성(城)마저도 판이하게 다른 구조가 되게끔 하였다.



만리장성

외세를 막기 위해서 넓은 범위를 수비할 성곽 건축이 필요했던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아서 국경을 방어했다.



오사카 성

그에 비해 일본은 어차피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적이 처들어올 일이 없다.

대신 전국시대 때까지 계속하여 가문중심의 봉건주의 사회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세력이

기반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분쟁을 했었다. 따라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보다는

주민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장군과 무사계급이 전투를 치르고 방어를 할 수 있는 형태의 성이 건축된 것.

유럽에서 말하는 Catsle의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개념의 성이라는 말이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런 문명을 건설했던 것은 아니고

고대 일본은 수나라, 당나라같은 중원의 왕조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

견수사, 견당사가 유명한데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당나라의 문화는

모래밭에 물붓듯이 일본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덴표문화라는 것이다.

이후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일본은 자기 나름대로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벚꽃 하면 일본이 떠오르게 된 것도 헤이안 시대부터 시작된 전통이다.

그 전에는 당나라가 좋아하던 매화를 일본인들도 좋아하였으나

헤이안 시대에 접어들어 벚꽃으로 갈아탔고 그 역사가 1000년도 넘었다.

어쨋건 중국과는 차별화된 제도와 문화를 구축해나간 일본은 나중에는

자기들이 중국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중국을 꺽고자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도 목표는 대륙 정벌이였다. 명나라를 치게 길을 내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 것인데

속전속결로 조선을 정복하여 조선왕을 인질로 잡고 조선에서 군량미와 물자를 확보한 후에

명나라로 진격하여 일본 천황을 베이징에 모시고 관백 히데츠쿠는 조선왕에 봉하고

장수들에게 각 지역을 하사해주는 것이 목표였다. (가령 가토 기요마사에게는 충청도를 준다거나)

그러나 조명연합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 영주들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를 평정하면서

명나라와 휴전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정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협상장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조선이 일본과 대등하게 협상하기에는 격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서양학문

(난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서양 학문을 네덜란드(화란:和蘭)로부터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륙 정벌의 원대한 꿈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일본은 내치에 주력하였다.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고 세계가 제법 넓다는 걸 깨우친 일본.

철학(哲學), 과학(科學), 전람회(展覽會), 경제(經濟) 등 수많은 번역어들도 만들었다.

실제로 에도시대의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남긴 기록들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일본의 번영에 감탄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1764년 1월 22일 오사카

오사카 100만채는 있다고 생각되는 집 모두는 기와집이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
도시의 크기는 약 40 km(10리) 정도로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의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수만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접해본 통역 통신사가 있지만 그도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진다'라고 말했다.
짐승과 같은 인간들이 2천년동안 이렇게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다.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

좌측에는 집이 늘어서, 우측에는 바다가 퍼지고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옥한 토지가 무한하게 퍼지고 있다.
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사람들의 활기차,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다리나 배….
모두가 오사카와 같이 뛰어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의 재능으로는 불가능하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다.



1764년 1월 28일 쿄토

거리의 번영에서는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야마토왕이 사는 도이며, 매우 사치스러운 도시다.
산의 모습은 용장, 강은 평야를 둘러싸 흘러 비옥한 농지가 무한하게 퍼지고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
분하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하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같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가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이 여행으로 최고다.
중국의 중심지에도 없는 풍경이다.
조선의 수도도 훌륭하지만, 나고야와 비교하면, 매우 외롭다.
사람들의 아름다움도 최고다.
특히 여성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답다.
저것이 인간일까?
「양귀비가 최고의 미인이다」라고 전해지지만 , 나고야의 여성과 비교하면,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다.나고야의 미인이 길을 걷는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의 일원은, 나고야의 미인을 한 명도 놓치지 않게, 머리를 좌우로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니 훗날 탈아론(脫亞論)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중국 못지 않게 발전한 데다가 중국과는 차별화된 독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중국이나 조선같은 나라들과의 관계를 과감하게 끊고 구미열강들과의 교섭을

도모하여 제국주의의 막차에 올라타는 것만이 식민지 신세를 면하는 지름길이라는 것.



이후 과거 중국이 했던 것처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관을 그렸는데 이와 같다.

일본 제국, 즉 내지인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고 그 아래로 계급이 나뉘어진다.

대만인과 조선인은 2등 신민이고 만주인은 3등 신민이고 그 아래로 계급이 점점 떨어진다.

실제로 당시 동아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일본 제국은 진짜 제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야 서구열강의 침략에 다른 나라들은 탈탈 털렸는데 일본은 스스로 제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륙 정벌을 목표로 다시 한 번 중국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애당초 덩치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국공내전 중이던 공산당은 일본 덕분에 살았는데 이유인즉

국민당이 일본군과 싸우느라 모든 힘을 다 써버리고 대만으로 쫒겨났기 때문.

그래서 모택동도 직접 "일본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 고맙다." 라고 했다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리할 경우 중국을 밀어서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세울 계획을 품고있던 미국은

예상과 달리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기존의 계획을 철회하고 다시 일본을 아시아의 지사장으로 세우게 된다.



미국의 지원과 안전보장 하에 일본은 산업을 복구하여 순식간에 세계 굴지의 공업국가로 부활했으며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을 지속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을 제치고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사실 그동안 축적된 인재와 제도, 기술 등이 있었기 때문에 무너지더라도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90년 대로 접어들면서 기나긴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고 2010년에는 덩치가 커진 중국에게 2등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건 중국이 워낙 인구가 많으니까 그런 것이고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 넘사벽이다.



일본도 전근대의 중국에 대해서 인정하고 평가하지만

현재 중국에 대해서는 사이즈만 클 뿐 문명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중국한테 굴복당하거나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적도 없으니

심리적으로 꿀릴 것도 없고, 그냥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교섭한다.

동양의 대표적인 대륙국가 중국과 대표적인 해양국가인 일본.

지금도 일본과 중국 간에는 교류도 이루어지지만 신경전도 치열한데

그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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