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미국 이스틀랜드호의 침몰 JPG


이스틀랜드 호





1912년 16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한 '타이타닉호'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미국내 운항하는 모든 종류의 여객선들의 구명 장비의 숫자를 늘리는 법을 제정한다

1915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서명한 'Seamen's Act'에 따라 미국의 오대호를 운항하는 모든 여객선들은 승선 인원 75% 이상을 태울 수 있는 구명 보트를 현거에 장치해야 했고 나머지 인원들을 태울 수 있는 고무 보트, 구명 조끼를 선내에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여객선들의 최초 설계 당시에 고려되지 않았던 추가 무게의 구명 보트들이 장착되자 선박의 평형 안정성에 문제가 발생되었으나 이 사실은 무시되고 만다







덫에 걸린 쥐처럼 1500명이 시카고에서 수장됨 이라는 당시 신문 보도




1915년 7월 24일 아침 6시 30분, 시카고의 '웨스턴 전기회사'의 직원들은 1년에 한 번인 회사 피크닉을 위해 인디애나의 미시간 시티로 떠날 여객선 '이스틀랜드'호에 탑승하기 시작한다

이 배는 웨스턴 전기회사가 챠터한 것으로 오늘 승객은 모두 웨스턴 전기회사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었으며  많은 이들은 체코 출신의 이민자들이었다

피크닉의 기분을 만끽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부두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고 선내에선 아직 아침이지만 와인과 맥주 그리고 풍성한 음식들이 제공되고 있었다









부두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기 위해 많은 승객들이 갑판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이스틀랜드'호는 평형을 잃기 시작하며 좌현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선원들이 밸러스트 탱크의 평형수를 조절하며 '이스틀랜드'호의 평형을 복원하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15분만에 '이스틀랜드'는 좌현으로 침몰한다

수심은 단 6 미터. 전체 2572명의 승객 중 배 안에 있던 844명의 승객과 4명의 선원은 배 안에 갇힌 채 사망한다







탈출에 성공한 승객 들 중엔 발 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부두로 뛰어 넘어온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부두 몇 미터 앞에서, 단 6미터의 수심에서도 배 안에 갇힌 승객들은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사고 후 이스틀랜드 운용 선사의 사주 및 관계자, 이스틀랜드호의 선장과 항해사가 기소되었으나 개정된 법에 따른 구명 장치들의 장착으로 인한 선박 상부 무게 증가 및 평형 유지의 어려움이 인정되었고 사고 후 많은 인원들을 무사히 탈출시킨 점을 인정받아 모두 무죄 처리 되었다

사고 희생자들 및 그 가족에게 웨스턴 전기회사는 총 10만 달러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시카고의 이스틀랜드호가 침몰한 장소







PS 1

이스틀랜드호는 원래 여객선이 아닌 과일 운반용 화물선으로 설계되었고 건조 도중 선주가 바뀌면서 화물+승객 500명을 태울 수 있는 용도로 변경된다

하지만 선박 인도 후 다시 한 번 공사를 거쳐 5대호 운항용 여객선으로 개조되었다






PS 2
USS Wilmette 윌메트 호

침몰된 '이스틀랜드'호는 인양된 후 미해군에 인도되어 'USS 윌메트'로 개장되어 취역한다

2차대전 까지 미해군의 훈련함으로 사용되다 1947년 퇴역 후 스크랩되었다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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