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베트남전쟁 미군의 흑역사[미라이 학살 사건] 을 알아보자.


 
1967년 12월 15일.

미군과 북베트남군의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때 즈음.

남베트남에 있는 미군 소유의 항구에 대규모
미군 병력이 상륙하고 있었어.


[제 23보병사단 정찰대의 부대마크]

그들은 바로 [미 육군 제 23보병사단] 소속의 병력들이었고 
아직까지 정글에서 전투 한번 치뤄 본 적 없던
따끈따끈한 신병들만 있는 부대였지.


 
그리고 이곳에 속해있는
제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 또한
대다수가 베트남은 처음인 신병들이었으며

곧 맞이하게될 첫 전투를 생각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중이었어.



 
1968년 1월 초.

제 23보병사단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에
투입된지 첫달이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불구,

C중대는 놀랍게도 단 한명의 전사자도 없이 오히려 베트콩
오십여명을 사살하는 공훈을 세우고 있는중이었지.


 
그러나 1월 30일.

북베트남을 등에 얹고 무려 35개의 대대를 동원한 베트콩의
대대적인 기습공격이었던 [구정 공세] 로 인해


 
C중대가 속해있던 20연대는 방어전투를 치루다가
중과부적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20연대가 수비중이던 [Son Tinh] 지역이 
베트콩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말았어.


 
[Son Tinh] 은 베트남 남부 해안도시인
[꽝응아이] 라는 곳의 행정구역중 하나였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군'의 해당되는 지역이라고해.


 
아무튼, C중대는 이때 있었던 전투에서 심각한 인명손실을 
입어가며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를 버텨내야 했지.

중대의 전사자들도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구정 공세] 가 진행중이던 2월 14일.

작전 진행 도중 부비트렙에 의해 중대원 다섯이
한번에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하필 전사자들 중에는 평소 병사들이 존경하고 따르던
장교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C중대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베트콩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하고 날카로워져 있게되었어.


 
한편, 베트콩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구정 공세] 는
미군의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공중지원 덕분에
그 기세가 한 풀 꺾여지게 되었고


 
간신히 방어선을 유지하던 미군 사령부는 
약간의 여유를 가질수 있게되었기에

공세 초반에 베트콩으로부터 상실했던 지역들을
되찾기위한 탈환작전을 수립하게 되었지.


 
제 23보병사단 또한 탈환작전을 수행하기위해
예하부대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어.
    
사단 사령부에서 예하부대들에게 탈환 명령을 하달하자 
[오런 K. 헨더슨 대령] 이 지휘하는 제 20연대 또한


 
[구정 공세] 이전에 제 20연대가 점령하고 있다가
빼앗겼던 [Son Tinh] 을 재탈환하기위해

각 대대들에게 [Son Tinh] 지역 내부에 있는 마을들을 
하나씩 담당하여 재점령할것을 지시했지.





                 " 작전회의 당시, 헨더슨 대령이 참모들과 대대장들
                    앞에서 그러더군요 [거기가서 다 쓸어버려!] 라고 "

                                            - 20연대 정보과장 B소령 -






 
3월 15일.

한편, [프랭크 A. 베이커 중령] 이 지휘하는 1대대는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날 작전회의를 통하여

1대대가 맡게된 [미라이 마을] 에는 현지 주민으로 위장한
베트콩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있는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는데


 
사단 사령부측의 항공정찰 보고에 의하면 실제로 
마을에서  AK소총과 소련제 중화기로 무장한 인원들이
확인되기도 했었어.


 
그래서 프랭크 중령은 작전에 투입될 장교들에게
민간인과 베트콩을 구분하기가 힘들것으로
판단된다는 이유로

미라이 마을의 모든 주민들과 가축까지도 잠재적인
베트콩 용의자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 명령은 곧 대대 지휘부를 넘어선 윗선에 의해 정정되어
베트콩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들은 모조리
사살및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 


 
그리고 1대대는 헬기를 통해 마을을 공중 강습하기로 했는데
A중대와 B중대가 마을 외곽을 포위하고있는 동안

베트콩에게 감정적으로 가장 악에 받혀있던 C중대가
마을 내부로 진입하여 숨어있는 베트콩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2월 14일에 부비트랩에 의해 전사했던 다섯명이 소속해있던
제 1소대가 C중대 최선두로써 마을에 진입하게 되었어.




             " 우리 1소대가 최선두로 마을에 진입할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던 그날 드디어 중위와 친구들의 복수를 할수 있겠다고
              기뻐했었지만 뭔가 생각이 복잡하더군요 전장이 아니라 
                          민간민들이 대부분일 마을에서 무슨 복수를
                                    할수있겠냐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 C중대 1소대 M60사수 조슈아 월튼 일병 -





 
3월 16일  AM 7:00

이른아침,
제 20연대 소속 병력들이 UH-1 헬기에 탑승해서
각자가 맡은 지역으로 출동하는 동안

예하대대중 하나였던 제 1대대 또한 UH-1 헬기에 탑승하여
[Son Tinh] 에 속해있는 마을중 하나인 [미라이 마을] 로
출동했다고해.


 
1대대가 탑승한 헬기편대는 코브라 헬기의 호위를 받으며
미라이 마을 외곽에 재빨리 병력들을 내려주었고

코브라 헬기들과 같이 상공을 비행하며 지상병력들을
엄호하거나 마을을 주시하고 있었어.


 
이후 A, B중대는 곧바로 소대별로 흩어져 마을 외곽에
대인지뢰와 철조망 등을 설치하고 대기중이었으며

C중대는 제 1소대를 선두로 마을 내부로 전진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사실, 1대대가 마을 외곽에 도착했을땐 이미 베트콩들과
그 동조자들은 헬기소리가 들리자마자 내뺀 상태였어.

그러다보니 C중대가 마을 수색을 시작했을땐 병사들이 찾던
무기나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 전투원은 전혀
찾을수가 없는 상황이었지.


 
이후부터는 지침에 따라 마을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마을 전체를
소각시킨뒤 베트콩의 은신처나 증거물들을 찾아야 했지만


 
마을 중심부에 있던 C중대 제1소대는 마을 광장에 해당되는
장소에 붙잡아두고 있던 마을주민 수십명을 모이게하여

신원을 확인할수 없는 병사가 최초로 주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한뒤 소대원들도 뒤따라 주민들에게 방아쇠를
마구 당기기 시작했고


 
마을 중심부에서 비명소리와 총성이 연달아 들리자 다른곳에
있던 마을주민들도 혼란과 공포에 빠져 모두들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어.


 
그리고 기다렸다는듯이 나머지 C중대원들도 각자 다른위치에서
도주하거나 항복의사를 표시한 주민들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기 시작했지.




       "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였습니다. 마치 모두가 한통속이
          된것처럼 명령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뒤쫒아가 죽이고
              어린아이까지 이마에 총알을 박아놓고 있었죠 "

               - C중대 2소대 H 중사 (6월 21일 전투중 전사) -




         " 극소수의 이성을 유지했던 자들은 사격을 중지하라고
                목이 쉬어라 외치며 병사들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지금 상황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거나 둘중 하나만 하고 있었는데 당시로선
                  도저히 멈출 방법도,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

          - C중대 1소대 조나스 영 상병 (4월 17일 작전중 실종) -






 
C소대의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자 다른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마을을 탈출하기 시작했었으나

일부는 다른 중대에서 설치한 철조망에 가로막히거나
미군들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고깃덩어리로
변해가기 시작했지.



C중대는 마을 곳곳을 누비며 가옥들을 불태웠고 
숨어있던 생존자들과 가축들을 사살하기 시작으며

심지어 갓난아기를 안고 도망치던 여성까지 붙잡아
권총으로 현장에서 처형하듯 사살하기도 했는데

마을 전체가 시체와 핏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고해.



       " 연료를 재보급하고 미라이 마을 상공에 도착했을때
                 우리는 두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을의 상당수가 불타고 있었고 길가에는 온통 시체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거든요 빌어먹을
          보병 녀석들이 아래에서 무슨짓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
   
       - 제 23사단 항공대 UH-1 부조종사 토마스 A. 맥기 -





 
한편, 미 육군 항공대 소속 OH-23 정찰 헬기를 조종중인
[휴 톰슨 주니어 항공준위] 는 정찰임무를 위해

미라이 마을 상공을 지나던 도중, 지상의 처참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기체를 하강시키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비무장 민간인이 미군병사에게 사살당하는
모습을 톰슨 준위가 직접 목격하자 


 
그는 곧바로 소속부대에 지원요청을 한후
마을에 헬기를 착륙시켰고


 
주변에 널려있는 부상자들을 헬기에 태워 구조하기위해 
근처에 있던 C중대 1소대장 [월리엄 캘리 소위]에게 
부상자들을 헬기로 옮겨줄것을 요청했으나

캘리 소위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의 요청을 거절했고 
일부 소대원들을 불러와 톰슨 준위와 헬기 승무원들에게
마을에서 나가도록 압박했다고해.


 
그러나 톰슨 준위는 이를 모두 무시하고 곧바로 헬기 승무원인
[글렌 안도레타 상병] 과 함께 부상자들을 헬기에 옮겨태워
현장을 빠져나간후

후방에서 대기중인 1대대 본부에 이들을 인계한뒤
다시 헬기를 타고 미라이 마을로 출발했어.


 
톰슨준위의 헬기가 미라이 마을에 또 한번 착륙을 했을땐
C중대의 학살은 어느정도 소강상태에 이르렀었고


 
착륙지점에는 C중대의 소대장들과 병사들이 모여들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고해.

그러자 톰슨 준위는 헬기에서 대기중이던 기관총 사수
[로렌스 콜번 상병] 에게 여차하면 같은 미군이라도
즉시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려두었었지.


 
그후, 톰슨 준위는 글렌 상병과 함께 C중대 장교들과
말다툼에 가까운 대화도중

근처에 있는 작은 구덩이에 여성과 아이들이 들어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것을 발견했고


 
즉시 그들을 헬기에 태우고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고
그와중에 시체더미에서 4살짜리 남자아이가
생존한채로 발견되어

아이까지 무사히 데리고 나올수 있었다고해.




         " 그들은 정말로 우리를 쏠 기세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군들임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들고 언제든 쏠 준비를 했고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뒷걸음질로 헬기에 타야했죠 
   
                      - 육군항공대 176부대  휴 톰슨 항공준위 -





 
이날 C중대는 250~280명 가량의 마을 주민들을 사살했으며
대대 지휘부에게는 탈환작전을 완료했음으로 보고했고


 
1대대는 뒤에 합류한 제 4대대 지원병력들과 함께 
이틀간 미라이 마을과 인근 촌락들을 불태우고
우물과 동굴들을 폭파시켰어.


 
그리고 C중대의 전쟁범죄는 국방부까지 관여하여 철저히
은폐되어 그 사실이 서서히 잊혀지는듯 했지.


 
1년이 지난 1969년.

미라이 학살사건 당시 1대대와 함께 미라이 마을로 갔었던
인원들중 [로널드 헤벌리] 라는 정훈하사가 있었는데

그가 전투현장의 사진을 찍어서 상부에 제출하면 검열을
통해 선정된 사진이 군 신문에 실리고 있었어.


 
그런데 로널드는 평소에 본인이 찍은 사진들중 민간인들이
미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진들은 곧잘
신문에 실리게되는 반면에


 
전쟁터의 처참한 모습들을 촬영한 사진은 필름째로
폐기처분 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해.

그래서 그는 카메라 두대를 들고 다니며 업무용 사진과
본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할 사진을 따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지.


 
학살사건이 있었던 3월 16일에도 로널드는 A중대와 함께
동행하고 있었으나 C중대의 학살을 멀리서 목격하자

마을 내부로 들어가 C중대가 자행하고있는 학살극을
몰래 하나씩 촬영하기 시작했어.


[실제 로널드 헤벌리 모습]

그리고 1969년에 로널드는 전역을하게 되었고 


[실제 시모어 허쉬 모습]

그해 11월, 로널드는 학살현장을 촬영한 사진 몇장을
클리블랜드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기자였던
[시모어 허쉬] 에게 전달해 주었지.


1969년 11월 20일.

클리블랜드 현지 신문사를 통해 로널드의 사진들은
신문 1면 머리기사에 실리는것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으로 퍼져가 미국 전체를 커다란 충격에 빠트렸고
반전 여론이 순식간에 폭증한것은 물론이고 

연방정부와 국방부도 사진들 뒤에 있는 스토리를 알게된후
발칵 뒤집혀 단 하루만에 베트남으로 인원들을 파견해


 
제 1대대의 주요 장교진들과 학살사건과 연관되어있는
병사들과 일선 지휘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조사를 시작했다고해.


 
하지만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대부분인데다

장교들도 명령하달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하여 학살이
발생한거라는 대답뿐,


 
직접적으로 학살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적도 없으며
베트콩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 정도로 결론 내려졌었어.


[재판장에 등장한 월리엄 캘리 소위]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던 14명의 제 1대대
장교들중 단 한명만이 정식으로 재판으로 받게되었는데

그는 바로 가장많은 마을주민들을 학살했던 C중대 1소대의
소대장이었던 [월리엄 L. 캘리 소위] 였다고해.


 
캘리 소위는 전문대학에서 성적부진으로 낙제를 한 후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여러직업을 전전하다가
육군에 자원입대를 하게되었지.

훈련병이었던 캘리 소위는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개인의 자질이 제대로 검증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어.


 
이후, 소대장으로써 1소대에 배치된 이후에도 독도법조차
재대로 할줄 몰라서 부하들에게 떠넘길 정도였고


 
인성과 리더쉽도 쓰레기 수준이었던지라 소대원들은
그를 매우 싫어한데다 캘리를 암살하기위해
몇몇 소대원들이 암살을 모의했는데

그들을 제지해야할 부사관들 조차 암살모의를 알면서도
조용히 묵인해줬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소대장으로써 얼마나 무쓸모한 인간이였는지를 
잘 알수있는 부분일꺼야.


 
결국 인맥도, 아무런 빽도 없었던 빈민출신의 캘리 소위는
민간인들을 학살에 동조했던 장교들과 병사들의
책임까지 모두 떠안은 채

홀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시작하게 되었어.


 
그러나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이 캘리의 형량을 종신형에서
가택연금으로 대폭 감형시켜주기 시작하더니
그마저도 3년뒤에 해제되었지.


 
그렇게 범좌자 캘리는 4년이 안되는 기간동안 
꿀만 빨다가 자유의 몸이 된거야.


[노년의 월리엄 캘리]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 캘리는
사업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으며

좋은집과 고급차량을 타고 다니며 잘먹고
잘살고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반면에 C중대와 총구까지 겨눠가며 주민들을 구출했었던
휴 톰슨 항공준위는 사건 이후에도 전장을 누비면서

여러차례 피격되어 추락하는 일을 겪어야했었는데
그때 입은 척추부상으로 재활치료를 받아야했고

이때의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가끔씩 다리를
절게되는 후유증을 앓게 되었으며


 
톰슨 준위를 도와 민간인 구조를 도왔던 안도레타 상병은
미라이 사건 이후에 있었던 전투에서 피격당해 전사했으며

정부가 육군 훈장 하나를 추서해주는것 만으로
그의 공훈은 퉁쳐졌다고해.


[인터뷰 중인 휴 톰슨 준위]

캘리의 판결확정 이후 톰슨 준위는 육상근무를 수행하면서
동료들과 지휘관들로부터 전우를 팔아넘긴 배신자라는
욕설과 비난, 심지어는 신원미상자로부터

살해협박까지 받아가며 겨우겨우 연금수혜 기간을
채운후 쓸쓸히 예편했다고 알려져 있어.


 
안타깝게도 사실 그는 [미 해군 시설단] 에서 복무를 마쳤던지라
징병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심 하나만으로 육군항공대에 재입대 했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지 상상도 되지않아.


 
결론적으로 [미라이 학살 사건] 이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미국내부의 여론은 전쟁을 반대하는 쪽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미국 전역에서 반전시위가 계속되었으며


 
감당하지 못할 막대한 전쟁비용과 인적손실과 더불어
미군에 의해 발생된 여러 학살 사건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게되는 결정적인
계기중 하나로 작용되고 말았어.











                      " 그곳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곳이었어요 
                    모든게 달랐죠 오히려 지옥과도 같았달까요 "







                   " 이 빌어먹을 정글에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까 
                    오늘은 누가 부비트랩을 밟고 팔다리가 날아가
                                불구가 된채로 고향으로 버려질까 "







                " 전장에 투입되면 항상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총에 맞아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죽어버리는게
                       엄청난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요 "







                 " 절친했던 전우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것을 몇달동안 빠짐없이
                 지켜보다보면 어느새 시체옆에서도 밥을 먹고
                                        잠도 잘수있게 되더군요 "






                "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사람으로써의 무엇인가가
                   사라져가기 시작해가고 있었어요 그게 뭐였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






     
                                     " 그러다 그 사건이 벌어졌어요 
                         사람들을 학살했던.. 에... 그 사건 있잖아요..? "
   
      





                      " 우리는 대다수가 여성과 아이들뿐인 무리를 
                     벽으로 몰아세웠어요 그들은 울고불며 애원했죠
                       본능적으로 우리가 무슨짓을 할지 알았나봐요 "







                        "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겼어요
             탄창 하나를 표정하나 안바꾸고 전부 그들에게 쏟아부었죠
                  그런데 다른 자들은 모두 쓰러져 있는데 한명이 아직
                                          살아서 멀쩡히 서있군요 "







                 " 3살이나 4살쯤... 아마 그쯤 되었을 어린아이였어요
                           맙소사, 우리의 조준선상에서 벗어날 정도로 
                                  작고 어렸던.... 음... 어린 아이였어요 "







                        " 너무나 겁에 질렸는지 그 아이는 벌벌 떨고
                       오줌을 지리며 서있었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는데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더군요 "








                     " 우리는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그애와 도저히
             눈을 마주칠수가 없었거든요 이제와서 왜? 그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놓고 왜 이제와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








                 " 모두 말없이 딴짓만 하고있었고 누군가는 완전한
                 [마무리] 를 지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섰죠
                      45구경을 꺼내들어 곧바로 그 아이의 머리를
                                                 쏴버렸습니다 "







                  "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도 저는 그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죠 "








                      " 그 아이를 쏴버린 이후부터 저와 동료들은
                        누군가를 무의미하게 죽이는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가버렸습니다 "







                       " 빌어쳐먹게도 저는.... 제 인생은 완전히
                           망가져버렸단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







            " 그래도 복무기간을 채우고 고향으로 돌아갈수는 있었죠      
                        배에서 내려 미국 땅을 밟는 그순간부터 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이 들더군요 "
             






                     " 제가 입고있던 유니폼도 불태워 버렸습니다 "









          "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의미하게 길거리를 떠돌아 다니며
                       저는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게 되었죠 "







                   " 그렇게 부랑자로 3년 가까이 살아오고 있네요 "








                " 밤마다 제가 쐈던 베트남 꼬마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왜 자기들에게 이런 짓을 한건지 모르겠다는
                        그아이의 표정이 눈물이 떨림이 저를 너무나
                                 고통스럽고 울부짖게 만들더군요... "






                 
                                 "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







                     "  음.... 죄송해요 인터뷰는 이걸로 끝내주세요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 C중대 1소대 로버트 J. 데이비스 상병 -
                                      1973년 5월 22일 지역 방송국의
                                               라디오 인터뷰 중에서
                         
    
    





   











                          * 인터뷰 이후 이틀뒤 데이비스는 자신의
                             낡은 승용차 안에서 권총자살함으로써
                                     2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차량 내부에는 데이비스가 미라이 마을
                                     주민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여섯페이지
                                             분량의 유서가 발견되었고
                                       




















                           * 그들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잡일을 해 모은
                            미화 4000달러가 유서에 동봉되어 있었으며





















                              *데이비스의 부모는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6년만에야 영안실에서 만날수있게 되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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