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건축에 대해 ARABOZA - 열도 편

동아시아 3국 - 한국, 일본, 중국 - 은 전통건축에 있어서


서로 비슷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매우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각각 나라마다 랜드마크가 있는데







그 중 일본은 오사카성, 히메지성, 니조 성, 청수사, 여러 목탑 등등 


장대한 규모의 목조건축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한국도 과거에 꽤 많았지만 전란과 유교문화 등으로 전부 소실 ㅠㅠ)


여기서는 일본의 건축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 알아보자. 


 



한국에서는 "한옥"이라는 이미지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전통건축은



나무가 주 재료가되는 이 건축으로서 ㅈㄹ 옛날 한나라때 그 원형이 시작된다.



물론 첫시작이 한나라라고해서 한국 일본 전통건축이 죄다 짱깨꺼라고 억지부리는 빡대가리새끼 없길바란다.



로마는 유럽건축의 시발점이지만



영국의 국회의사당이나


프랑스의 바로크양식이 죄다 이탈리아꺼라는 주장을 하는거랑 똑같음.



아무튼


한나라때 시작되어 당나라때 나름 체계를 갖춘



대륙의 목조건축술은 한국은 물론 더 멀리 일본까지 전파되어,



각 지역에 맞게 자리잡고 발전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6세기 이후 당으로 가는 견당사를 통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대륙문명을 직수입해옴)



한편 한반도의 백제, 신라, 고구려는 대륙에서부터 들여온 새로운 문물을 토대로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 신라의 황룡사로 대표되는


대륙과는 다른 한반도만의 독특하고 발전된 ㅆㅅㅌㅊ 목조건축문화를 이뤄낸다.




(백제 능사. 1탑 1금당으로 전형적인 백제식 사찰. )



(고구려의 정릉사. 1탑 1급당으로 같은 부여계나라인 백제에 영향을 주었을 것임)





(신라의 황룡사. 그중 뒤에보이는 거대목탑은 벼락맞고 불타도 그동안 유지/보수되며 잘나가다 조선에 완전히 폐허가 된것으로 추정)




(전성기 신라 서라벌의 월성 복원도)





그렇다면 이러한 거대한 목조건축은 어떻게 세워지는걸까?



한반도의 목조건축 구조는 99프로 "대량식"인데



그렇다면 이 대량식 구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천두식이란 구조도 있지만 대륙이나 열도에서나 발견되고 한반도에선 발견되지 않기에 스킵)



대량식이란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으며 기둥 위에 놓여지는 들보로 만들어져있다.





위에 그림에서 바로 알수있듯, 기둥 위에 놓인 들보가 


지붕의 무게를 그대로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하고 직설적인 구조라, 세계 어디를 가든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구조이기도 하다.



(가장 기초적인 통나무집. 여기서도 대량식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이 대량식 구조의 장점은 구조가 매우 간결하고


건물 내부 공간이 비교적 넓다는 것이다.


한번 그림으로 그 구조를 뜯어보자.






위 그림에서 보이듯 건물의 폭을 간구, 깊이를 오행이라 하는데


이 대량식 구조는 간구 방향으로는 그저 기둥을 더 추가해 놓음으로써


길이를 무제한으로 늘릴수 있다. (다만 지붕의 높이는 그대로)


하지만 오행 방향으로 건물을 늘릴 경우


지붕의 높이가 높아짐과 동시에


지붕과 들보사이에 큰 갭 (오른쪽 사진 흰색 화살표)이 생기게 되어 


지붕을 안정적으로 떠받들기가 힘들어진다.






그리하여 건물의 오행(폭)이 길어질수록 안쪽의 기붕을 높게 하여


지붕을 지탱하는 수법이 채택된다. 그림을 보면 안쪽 기둥이 바깥쪽 기둥보가 더 긴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조적으로 기둥 위의 들보를 2중으로 하여 


들보와 지붕 사이를 매꾸는 방법도 쓰였다 (윗그림 흰색 동그라미).


그러나 이 구조는 매우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건물이 오행 방향으로 넓어질수록, 


안쪽의 높아진 지붕을 지지하기 위해 더 커다란 목재가 반드시 필요하단 것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단면도. 안쪽 기둥들은 높아진 지붕을 떠받들기 위해 바깥쪽 기둥들보다 더 길어야만 했다.)


거기다가 조선 건축의 경우, 


(왠만한 조그마한 한옥에도 지붕에 쓰이는 흙의 무게는 2.5 - 3톤을 뛰어넘는다)


지붕과 기와 사이에 상당한 두께의 흙을 올려 덮었는데,


이는 흙때문에 상당히 무거워진 지붕이 기둥을 굳세게 짓누름으로써


상대적으로 구조가 안정되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마찬가지로 흙때문에 지붕이 너무 무거워짐으로써 


지진에 매우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덤으로 장마땐 비를 머금은 흙때문에 지붕이 더 무거워짐)




거기다 지붕 기와밑의 흙때문에 장마만 지나면 지붕에서 잡초가 자라서 주기적으로 교체가 필요했다.






구조적으로 접근해보자면



이 엄청난 양의 흙때문에 지붕의 경사가 30도 이상을 넘어가게 만들수 없기도 했다. 



왜나하면 지붕이 가파를수록 흙이 지붕위에서 계속 흘러내릴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강화 조선식 한옥 성당. 지붕의 기울기가 완만한 편)


지붕이 완만하다는 것은 종교건축으로서는 또 하나의 단점이기도 했다.


지붕이 거대하고 웅장할수록 보는 이를 경탄케하고 건축물의 위용을 뽐내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



(도쿄의 센소지. 거대한 지붕의 크기가 보는이를 압도한다)





아무튼 대륙식 지붕의 어마어마한 흙의 무게는


장마와 지진이 잦은 일본으로써는 매우 위험한 구조일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0세기쯤 일본의 목수들은 생각을 했다.



"지붕을 무겁게 하지 않고 커다란 나무들을 쓰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을순 없을까?"






그리하여 일본은 윗 그림과 같이,


지붕의 흙을 없애버렸고, 그와 동시에 지붕과 서까래 사이의 빈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을 "노고야"라는 구조로 채워 버린다.





윗 그림의 구조에서 보이듯이,


기둥 위의 들보와 지붕 사이에 빈 공간을 마치 정글짐같은 조그마한 트러스 구조 나무들로 채워넣었다.


이 노고야라는 공법으로 인해,


안쪽의 기둥은 대량식에서처럼 굳이 길다란 나무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정글짐같은 노고야라는 방법, 혹은 조그마한 트러스 나무구조물로


지붕까지 채워넣으면 해결됬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일본의 목수들은 구하기 힘든 거대한 나무를 찾아헤메지 않고,


고만고만한 크기의 나무들만 써서도,


장대한 폭의 건물을 만들어 낼수 있었다.


이제 흙이 사라지고 노고야로 채워진 일본의 지붕은


지붕이 더이상 무겁지 않기 때문에 지붕의 각도를 가파르게 만드는것도 가능했다.



(군산에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 지붕이 거대해보이는 이유는 지붕의 기울기가 45도를 넘어 매우 가파르기 때문)







이미 한단계 발전한 일본의 목조공법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데,


그것은 바로 12세기 "하네기"란 부재의 발명이다.



"하네기"는 "하앙"이라는 구조에서부터 발전했는데, 



전통건축에서 이 하앙이란 길다란 목재는 아래의 기둥 바로 위에 올려진다.




그리고 이 하앙 위에 가로로 동그란 목재인 도리가 올려지고






또 그 도리 위에 세로로 서까래가 올려진다. 
(서까래가 도리위로 여러개가 나란히 올려지고 그 위에 최종적으로 흙, 기와가 올라감)





이 모든 것이 결합했을 때 아래와 같은 모습이 되는데,




즉, 하앙은 도리와 서까래와 또 그위의 지붕의 무게를 모두 버텨내 바로 아래 기둥으로 전달하는 역할인 것이다. 




12세기 일본의 기술자들은 이 하앙을 지붕 안으로 집어넣어 안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한다.



(왼쪽 그림의 오다루키가 하앙)


윗 그림처럼 지렛대 원리로 지붕을 지탱하는 하앙이


지붕 안으로 들어갔고, 이는 "하네기"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공법의 장점은 더 이상 이 커다란 하네기가 지붕의 하중을 전부 기둥으로 모아주면서


하네기 위의 서까래는 더 이상 무게를 받지 않고 장식용으로 변해


지붕을 더 길게 뻗을 수 있었고, 또한 가늘고 섬세한 모양으로 발전할수 있었다.



(교토의 호칸지. 매우 넓고 길게 뻗은 지붕은 일본에서만 찾아볼수 있는 고유의 양식이다.)



(하네기와 노고야 덕분에 지붕의 처마를 매우 길게 뺄수있어 더 수려한 곡선의 처마를 갖게됨)





(하네기가 모든 하중을 받기에 서까래는 매우 가늘해지고 섬세해졌다.)



(서까래가 더이상 하중을 받지 않자 서까래에 심지어 금박을 입히거나 하는 등의 공예를 할수있는 수준까지 도달함.)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송나라로에서부터 "누키"라는 기법을 수입하는데,





이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목재로 관통시켜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수평력에 대한 취약함을 보강하고 축부를 강화하게 되었다. 


축부가 강화되어 지진으로부터 조금 더 튼튼해지자,


일본의 건축술은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건물의 벽이 강화되자, 


전에는 그 무게때문에 기둥 바로 위에만 두었던 하네기를


벽면 어디든지 배치할 수 있게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4세기부터는 지붕 내부가 전부 하네기로 가득 찬다.




 
윗 사진에서 손질되지 않은 거대한 나무들이 하네기이고


그 뒤로 지붕의 무게를 하네기에 전달해주는 효율적인 트러스 구조인 노고야가 보인다.

 


지붕의 무게를 전부 벽과 기둥으로 전달해주는 하네기가 발달하자,


이제 안쪽의 기둥은 바깥의 기둥만큼 두께가 두꺼워지지 않아도 되었다.


즉, 공간 배치의 자유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의 건축은 아래와 같은 형태로 최종 발전한다.




14-15세기에 이르러서는 


지붕 내부의 노야기 구조에까지 누키가 도입되어


더욱 더 강고한 지붕틀이 탄생하였고, 지붕 자체가 독자적인 강도를 획득하게 되었다.


지붕 자체가 내구력을 가짐으로써 지붕이 무거워할 필요가 없었고


광대한 내부공간을 떠받칠 거목도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이쯤되어 일본의 목조건축술은 


큰 나무를 많이 쓰지 않고도 장대한 지붕과 가로 세로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을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대륙의 양식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한 것이다.




(북경 자금성 태화전 단면도. 안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더 큰 기둥과 들보가 존재한다.)



(반면 위의 새로운 공법들을 통해 교토의 니시혼간지는 기둥의 사이즈를 동일하게 하고도 더 큰 지붕과 내부 부피를 확보할수 있었다.)







교토의 히가시혼간지라는 절은 이러한 공법이 모두 활용된 건축물인데


높이 38m 측면 58m 정면 76m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세계최대면적의 목조건축물이기도 하다.





(사람의 크기를 통해 건물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짐작할수 있다)






(절의 입구인 중문조차 압도적인 크기다)





내부도 봐보자. 





 또한 목재사용을 최소화하여 광활한 내부 공간을 확보한 것도 주목할만 하다. 



이러한 발전된 공법의 도움으로 근대 일본의 일개 성주는 조선의 왕보다 더 큰 침실을 쓸 수 있었다.






종교건축의 핵심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하여 


신에 대한 경외감과 그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구현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이런 압도적인 규모의 건축물은 종교건축의 철학을 매우 충실히 담아냈다 할수 있다.





백제의 종교건축인 미륵사 복원모형. 거대한 석탑과 목탑이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다.



왼쪽은 경복궁 근정전, 오른쪽은 지금은 사라진 황룡사 금당. 


거대한 규모의 황룡사 금당은 종교건축의 철학을 매우 잘 구현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1000년이상 앞서 지어진 신라시대의 건축물이 이 정도 스케일이란 것에 주목할만 하다.  









위의 노트르담 성당, 성 베드로 성당, 혹은 앙코르 와트처럼


근대까지 거대한 랜드마크들은 대부분 종교의 후원으로 완성될수 있었다. 



(황룡사 복원도)


과거 한반도에서도 이와 못지 않은 고대 거대건축들이 있었다. 


이들은 삼국-고려시대동안 불교와 상업에 호의적이었던 왕조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보수/유지를 통해 한반도에 살아남았으나 (백제 미륵사, 신라 황룡사 등)






불교를 탄압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에 이르러


절에 대한 유생들의 테러와 그를 눈감아주는 왕조에 의해


마침내 한반도에서 전부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한국의 랜드마크가 될만한 거대한 건축들이 오늘날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백제의 미륵사 석탑. 고려때까지도 유지되었으나 조선을 거치면서 관리가 되지 않아 처참한 돌무더기 폐허로 변한다.)




(신라인의 뛰어난 목조 석재 기술이 투입된 불국사도 조선에 이르러 서서히 파괴되고 잊혀져갔다.)




조선에 들어 기술이 쇠퇴한건 건축뿐만이 아니었다.


공예에 있어서도 삼국의 세심하고 다채로운 기술들은 


상업을 천시하고 자칭 "검소함"을 내세우던 조선시대에서 


전부 명맥을 잊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고대 백제인의 예술혼이 담긴 ㅆㅅㅌㅊ 기와도 오히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에 이르러 퇴화해 버린다.



조선은 그냥 회칠로 기와의 끝부분을 마감해버렸음ㅠㅠ




백제 금속공예의 정수가 담긴 금동대향로 같은 물건도 조선에선 더 이상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는 금목걸이와 귀걸이. 


이러한 화려하고 섬세한 작품들은 길어봤자 고려를 이후로 더이상 한반도에선 발견되지 않음.






대륙으로부터 들어온 목조건축물은


일본이라는 환경 속에 구조적, 공학적으로 점차 발전하여 


마침내 본래 대륙의 그것에서부터 훨신 더 진보된 형태로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동안 조선에서는 일본과 같은 구조적 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삼국시대에 세웠던 ㅅㅌㅊ 고대사찰들을 방치하고 냅두느라 신경쓰지도 않았음.




(1905-1944. 한국 미술 건축사의 선구자였던 고유섭 선생)


한국 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선구자로써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고유섭선생조차 조선건축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다.


"조금도 중국 본계의 양식을 이탈함이 없으나 또한 향토색의 수이(殊異)를 따라 다소 상위(相違)함이 있다. 일례를 들면 지붕의 곡선이 중국의 그것보다는 완만하여졌고 일본의 그것보다는 굴곡 있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향토색을 구비한 조선 건축이 타방인국(他方隣國)에도 영향함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국의 그것과 다른 독창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 건축은 중국 양식의 일퇴화(一退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은 중국의 양식을 전부 포괄하여 그것을 변형시키지 못하고 다만 조선의 힘이 자라는 한에서 그를 섭취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건축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다."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공법을 토대로 한발짝 더 나아가 자신들만의 양식과 건축세계를 구축한 일본과는 달리


아쉽게도 조선은 유학에 얽매여 600년 동안 어떠한 발전도 없었음이 참 안타까운 점이다.


긴글 읽어줘서 고맙다.


-끝-






3줄요약

1. 대륙에서 시작된 목조건축술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전파됨

2. 일본에선 대륙의 기술로부터 한발짝 진보하여 구조공학적으로 더 앞선 건축술을 이룩함

3. 동시대 한반도에서는 구조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한반도 고유의 건축 기법을 만들어냄. 다음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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