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대사회의 역사는 한국 못지않게 상당히 가파른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유례없는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의 실용으로 인해 1945년 일본제국의 세계 2차대전의 패망 이후, 1946년에서 1950년대를 기점으로 태어난 일명 전후세대(戦国世代) 혹은 단카이세대(団塊世代),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일본 전시대 역사상 최고의 초고도 경제 성장을 이끈 주역들이 탄생하게된다.
이들의 특징이 학력이 크게 좋지는 않았는데, 당장에 전후세대의 남녀 대학 진학률이 20%대를 넘기지못하는 실정이었으며 (대략 15%대) 상업고, 공업고 출신 혹은 아예 중졸들이 사회에 상당히 많이 진출해 있었다.
전후세대는 전쟁에서 패망한 20세기 중반의 일본으로부터, 말그대로 열정 하나로 롯본기, 신주쿠, 시부야의 수많은 빌딩들을 지어올린 산업화세대였으며, 동시에 이들은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경제성장기 1980년대의 버블시대에 기업체, 정부기관의 과장, 간부급 이상의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며 초고도 경제성장기의 기반을 마련한 세대였다.
이 전후세대가 마련한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생, 70년대초반생들이 1980년대의 사상 다시없을 초고도 경제 성장의 마약같은 달콤함에 취한다.
1950~1960년도의 사이로 추정되는 롯폰기의 거리
현재의 도쿄타워와 롯폰기 힐즈(六本木ヒルズ)가 보이는 롯폰기의 야경
1959년의 신주쿠
현재의 신주쿠 (신주쿠 3쵸메 新宿3丁目, 가부키쵸 거리의 앞)
1980년도까지 일본의 기업들은 당시 불법적인 방법까지도 동원하여 상당히 공격적인 재테크를 하고있었는데, 일본의 기업은 원래 제조업정신의 일환으로써 기업의 본분을 망각한체 종이노름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주식, 펀드 등의 재무에 관여하지 않는 형태였지만, 1980년도를 기점으로 일본정부는 사실상 일본기업들의 공격적인 재테크를 정부차원에서 간접적으로 장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에 더해서 성장세가 둔화될 조짐이 보이자, 일본정부는 즉각 기준금리를 5%에서 무려 반토막내버려 2.5%로 낮춰버림. 이에따라 기업들은 너도 나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써 투자, 재테크에 몰빵을 쳐버리니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시중에 각종 기업체, 사회 각종 고위 인사들의 자산으로써 유통된다.
어느정도의 돈이 기업체를 통해 시중으로 유통됬는가 하면, 1985년의 기업체 전체 특별자산 펀드계정 (일명 투금계좌 投金口座)이 9조엔 (현재 한화 약 410조원) 4년만에 1989년에 무려 40조엔 (현 환율 기준 한화 약 1800조원) 으로 말그대로 천문학적 액수의 엔화가 시중에 기업체의 투자 명목으로 유통되어 버린다. 당연히, 일본의 주가는 시간당 가파르게 상승세를 치는 버블이 형성된다.
이처럼 구름 위를 관통하고 우주를 날고있던 일본 주식 거품은 부동산 거품과도 자연스레 직계되는데, 이게 그 전설적인 일본 부동산 버블경제를 일으킨다. 1980년대에서 1990년 약 10년간 도쿄의 부동산은 무려 5배 이상이 폭등했다.
당시 부촌인 미나토 구(港区)의 경우 평당 땅값이 무려 2000만엔 (한화기준 약 9억원)이었고, 일본 열도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긴자(銀座)의 경우 겨우 평당 땅값이 무려 1억엔 (한화기준 약 46억원) 을 육박하는 수준에 이르른다.
(닛케이 지수와 부동산값의 변화폭, 주가의 가파른 상승으로 부동산 값도 그에 상응해 가파르게 상승한다. 다만 닛케이 지수의 경우 버블이 꺼진 1990년도 이후를 기점으로 무섭게 하락하지만 부동산 버블의 하락은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당시 일본의 경제호황은 말그대로 "일본 열도 역사상 최고의 호황" 이라고 불렸는데, 당시 세계 롤스로이스 생산품의 1/3이 일본에 있었고, 벤츠, BMW를 비롯한 독일제 명품차들이 도쿄 길거리에 발에 채이듯 굴려다녔으며, 무려 미국을 제치고 슈퍼카 보유국 세계 1위를 달성했다.
일본 경제호황이 얼마나 무서운 수준이었냐면,
1. 당시 시중 예금 금리가 무려 10% 수준이었다. 말그대로 보통 예금통장에 1억엔만 꽂아두면 천만엔이 따박따박 박히는 수준이었다.
2. 20대 사원 초봉 천만엔 (현 한화기준 4.6억원). 고등학교를 졸업 후 갓 사회에 진출한 20대 사원이 받는 초봉은 무려 4.6억원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이유를 굳이 느끼지 못했으며, 대졸자의 경우 2~3천만엔 (현 한화기준 10억원 이상) 명문대졸의 경우 부르는게 연봉이었다.
3. 기업 면접시 지원자에게 수고비, 거마비 명목으로 2~3만엔(100만원 이상)을 현찰로 지불했다. 당시 취업은 하지않은체 면접만 보러 기업체를 돌아다녀도 기업체 정사원의 월급과 맞먹는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4. 전세계 억만장자 70%가 일본인, 그 중 세계 갑부 1위가 세이부의 창업자 츠즈미 야스지로 堤康次郎 (1889년 출생,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내 동문 선배게이 ㅆㅅㅌㅊ)였다
5. 미국과 뉴욕의 부의 상징이자 세계 최초의 마천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일본의 부동산 갑부 요코이 히데키가 인수
80년대 일본 도쿄의 클럽, 80년대 경제호황의 부산물로 클럽문화가 발달한다
하룻밤 클럽에서 여성과 원나잇하는데 날리는 현찰로 1만엔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게 보통이었다.
심지어 택시를 잡는데도 1만엔 뭉치다발을 손에 쥐고 흔들어야 택시가 서는 정도였다.
당시의 "성공"이란 일하고자 하는 "의지"와 "조금의 노력"만 있다면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였다. 당시의 남성들은 고연봉으로 인한 사회에서의 지위가 가파르게 상승하여, 밖에서는 일, 집에 들어오면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것이 당연시되는 가부장사회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남자 한명이 벌어오는 돈으로 충분히 가계가 풍요롭게 돌아갔고, 자연스레 남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으며, 남자다운 남자, 마초남의 열풍이 부는 것도 이 시절이다. 이것이 1980년 일본의 초고도 경제성장기의 황홀함을 경험한 버블세대가 현대사회의 기성세대로써 현세대, 사토리세대를 의지와 노오오오력이 부족한 세대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당시에는 정말 두다리 두팔만 멀쩡히 달려있다면 얼마든지 큰 돈을 끌어안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번 버블시대를 경험한 대다수의 버블세대는 그 황홀함을 잊지못하며 계속 과거의 영광 속에서 살고있다.
당시의 일본여성들이 일본남성들에게 결혼 조건으로 요구하는 조건이 그 유명한 3고(3高)였는데, "고학벌, 고신장, 고연봉" 이었다.
당시는 남성들은 물론이요, 일본여성들도 괜찮은 남자를 골라잡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경제가 극도로 호황이라, 발에 채이는게 고연봉 직장인이었으며, 발에 채이는게 그 돈으로 관리받고 비싸게 구는 여성들이었다. 말그대로 사실상의 진정한 원조 김치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80년대의 일본여성들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대해 제대로 묘사, 비판한 만화영화가 바로 "크레용 신짱(짱구는 못말려) 어른제국의 역습" 그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일본 미디어 예술, 가장 위대한 애니메이션 100선의 19위 어른제국의 역습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 속 "20세기 냄새"를 맡은 어른들은 모두 20세기의 향수에 젖어 다시 어린아이, 젊은시절로 돌아가버리고 20세기 마을에서 살고자하는데, 이는 1980년대 버블이 만든 초고도 경제 성장을 겪은 세대가 1990년을 기점으로 버블이 꺼지고 경제성장률 0%대의 절망적인 경제상황, 즉 잃어버린 10~30년을 맞이하며 과거의 영광과 달콤한 시절을 잊지 못하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을 암묵적으로 묘사한다.
작중에서 노하라 히로시(신형만)가 어린아이가 된 이후, 노하라 신노스케(신짱구)에 의해 과거 회상을 하는 장면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어린자식들 보여주려고 부모들이 같이 보다가 되려 부모들이 흐느껴울었다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전설적인 명장면인데, 어린아이들은 공감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만, 초고도 경제 성장과 버블경제의 달콤함, 그리고 그 후 잃어버린 10~30년으로 일본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온 부모세대에게 이 장면은 자신들의 지난 수십년의 과거를 일축시켜 보여주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 경제사를 미루어볼때 이 영화 자체가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20세기 냄새를 맡고 과거의 향수에 빠진 노하라 히로시가 자신의 지독한 발냄새를 맡고 다시 원래상태로 돌아오는 것 자체도 시사하는 바가 큰데, 과거의 영광에 젖어있던 자신에게 자신이 뼈빠지게 일하며 십수년간 열심히 회사를 다니며 생긴 현재 발냄새를 맡게하면서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장치역할을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かみかくし) 의 경우, 처음 등장하는 건물의 터널에 들어간 후, 치히로의 아빠는 이 건물이 한 때 버블경제 시절의 놀이동산이었다는 말을 한다. 즉, 터널로 들어간 시점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일본의 버블 경제가 시작됬다는 말이며, 그 버블경제의 주역인 치히로의 부모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왈 "80년대 버블경제의 개돼지" 라고 묘사되며, 경제호황을 주체하지 못하고 너도나도 사치에 (작중 치히로 부모가 음식을 마구먹은것) 외제차를 탔으며 (실제로 치히로 아빠의 차는 아우디 제품인것이 작중 초반부터 강조되어 묘사된다) 그 버블의 끝인 잃어버린 10~30년은, 자신의 자식세대가(치히로) 온전히 자신들의 과거를 뼈빠지게 일해서 책임져야하는, 자식세대들이 욕망을 절제한체 미래, 대가, 심지어 본인들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체 살아갈수밖에 없는 사토리세대(悟り世代, 일명 득도한 세대)로 만든 것을 비판하는 영화이다.
현세대 일본에서 이들 초고도경제성장세대, 버블세대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운좋게 자신들은 막말로 꿀이 질질흘러 넘치다못해 꿀통이 박살난 시대에 태어나 그 단물을 쭉쭉빨아당겨놓고는, 수십년이 지나 그 버블의 부채와 책임을 다 떠앉아야할 신세대에게 "노력"과 "의지"가 없기때문이라는 드립을 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로컬라이징하자면 정확히 486세대와 들어맞는다) 버블세대의 젊은 시절과 현세대 젊은이들의 사회상은 말그대로 차원을 달리한다.
80년대 버블경제의 3고 (고학벌 고수입 고신장)에서 90년대~2000년대의 3평(평균적인 연봉, 평범한 외모, 평범한 성격) 그리고 현대사회의 4저까지 (낮은자세, 저리스크, 낮은 의존, 저연료)
4저는 자신감이 높지않고 자신을 낮추고, 도전정신없이 위험부담이 적으며, 누군가에 대한 의존도가 낮고, 먹는것 입는것 꾸미는것 등의 본인에 대한 연료가 낮은 사람을 선호하는 신세대의 현상이다.
1980년생부터 1990년생을 기점으로 사실상 잃어버린 10~30년의 경제성장률 0%대의 일본을 무겁게 떠앉아오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많은 포기를 낳았는데, 일본의 젊은세대는 야망을 잃어버린 세대라고도 묘사된다.
집, 자동차, 시계, 연애를 포기하며 오로지 본인 한명만 먹여살릴 수 있다면 된다주의가 팽배하게 퍼진다. 이는 90년대생~밀레니엄 베이비 이후의 세대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인데, 일명 사토리세대 (悟り世代, 일명 를 정부차원에서 간접적으로 장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남성들은 더이상 연애를 필수라고 생각하지않고 사치로 여기게 된다. 그에 따라 애니메이션 및 오타쿠문화가 강하게 발전된다.
수많은 럽폭도를 양산한 애니메이션 러브라이브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거리
여성들의 경우도 더이상 돈많고 권위적인 남자, 마초남, 남성적인 남자보다는 중성적인 예쁘장한 꽃미남들을 찾기 시작한다.
사토 쇼리
2017년 일본 국보급 꽃미남 배우 1위
아라타 맛켄유
헤이세이 점프의 간판 비주얼이자 배우, 야마다 료스케
일본은 현대에 다름아닌 취업호황을 맞이하는데, 이는 80년대의 취업호황과는 적나라하게 대조된다.
80년대의 취업호황은 "좋은 연봉과 조건의 일자리"가 발에 채이고 넘치던 시절이고, 현대의 취업호황은 고령화사회가 지속되고
경제인구의 감소에 따른 먹고살수"는" 있는 정도의 일자리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정작 누구나 선망하는 대기업, 외국계 투자은행, 외국계 기업, 유수기업들의 경우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사가능하며, 이 마저도 명문대 출신들에 의해 모두 점령되고있다.
대다수의 일본 사토리세대들은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본인 한명 먹여살리기위해 조용히 고군분투하며 살고있다.
본인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출신이고, 일본의 경제사, 정치사, 사회상 등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했다.
반응이 좋다면 2탄부터 꾸준히 일본에 관한 전문 정보글을 연재할 예정이다. 긴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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