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친위대 소령이자 천재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 대해 ARABOJA





로켓에 핵탄두를 탑재하면 그대로 대량살상무기가 되는 것이고, 유인 우주선을 붙이면 우주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로켓발사기술은 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로켓을 사용해 발사체를 안정적으로 특정 궤도에 올려놓을 수있는 국가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할수 있는 저력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은 이런 이중적인 로켓의 성격에 걸맞은 투페이스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출생과 성장배경

남작지위를 가진 공무원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귀족에 공직자면 부족한 가정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어렸을때부터 우주공학도의 꿈을 꾸지는 않았다고 한다. 뛰어난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하지만, 똘끼는 충만해 보인다. 로켓추진 자동차의 기록경쟁에 영감을 받은 '12세' 브라운은 장난감 수레에 폭죽을 달아 폭발시켜 러시아워의 거리에서 큰 혼란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풀어주기 전까지 경찰에 연행되어 있었다.  초등교육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에도 흔한 케이스는 아니었다고 하니 자식농사에 큰 공을 들였던것 같다. 중학교 졸업후 우주여행에 관심이 생겼는지 독일우주여행협회에 가입해 동료들과 함께 2년동안 로켓발사시연을 약 80회 시행했다. 결국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장 발터 도른베르거의 눈에 들어 베를린 공과대학에 하이패스로 입학해 액체연료 로켓을 전공하게 된다. 베를린 공대는 2013년 영국의 대학 평가 기관 순위 기준 공학 분야 세계 대학 순위 41위, 독일 내 1위 대학으로 현재까지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대학이다. 특례입학 ㅍㅌㅊ? 그리고 나중엔 아인슈타인이 공부한 대학과 같은 취리히 공과대학에서도 공학을 공부한다. 개돼지들앞에서 로켓모양 폭죽 80번 쏴올리면 서울대학교 기계공학부 입학 건웅? ㅇㅇ 씹건웅.








로켓연구소에서

전쟁준비를 가속화하던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업고 폰 브라운은 페네뮨녜 로켓연구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A1, A2, A3, A5로켓, 항공폭탄 V1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로켓, V2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V2는 영국에게 실제로 쓰인 로켓이고,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낸 좋은 무기였다. 폰브라운의 로켓공학 팀은 1936년에 로켓추진체를 항공기에 붙이는 연구도 시행한다. 당시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 왈시츠를 설득해 1937년 6월 네우할던버그의 활주로에서 가장 최신 비행기 중 하나가 왈시츠의 시험 비행 중 고장 나버린 피스톤 엔진을 달고 날아올랐다. 그 때 그 비행기는 폰 브라운의 로켓 동력만으로 추진되었다. 노즈 기어가 들린 착륙과 기체에 화재가 발생 함에도 불구하고 비행기가 뒤쪽에서 추진력을 냄으로써 만족스럽게 날 수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왈시츠의 사진. 로켓을 붙였던 항공기는 하인켈이 제공했다.






친위대 내부 입지


브라운은 공학도이지 정치인은 아니었다. 입단속을 잘못하여 패배주의로 고발된 적이있다. 친위대에 협조하던 여자 치과의사가 '지원도 없고 전쟁도 져간다'는 브라운의 발언을 문제삼아 사보타주로 신고한 것이다. 다행이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손을 써서 풀려나긴 했으나 사고치고 남의 빽으로 풀려나는 버릇은 12살부터 그때까지도 고치지 못한듯. 그렇다고 친위대활동에 완전 냉담했기도 보기도 어려운 것이,
군수노동에 필요한 수용소의 포로를 요구했던 친서도 남아있을 뿐더러 기 모랑이라는 강제노동 생존자가 자신에게 태형 25대를 선고했던 브라운을 증언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하인리히 힘러 뒤에 있는 인물이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두명의 군인 사이에 있는 흐릿한 인물이다. 최종 계급은 친위대 소령이었다. 






종전 이후 미국 협력기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져가던 와중 미국은 페네뮨네 연구소를 기갑부대로 점령해버린다. 브라운은 앞서말했듯 충성스런 군인이라기보단 기회주의적인 공학도의 모습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미국에 항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미국의 로켓공학보다 약 25년정도 독일의 로켓공학이 앞서있다는 판단을한 미국은 브라운박사를 소련과의 우주경쟁을 위한 히든카드로 써먹었다. 브라운의 도움아래 NASA 아폴로 달탐사 계획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결국 브라운은 달여행을 실현시키고 싶어했던 유년기의 꿈을 이룬 셈이다. 






브라운의 업적과 평가


불완전한 고다드의 로켓과학을 엄밀한 로켓공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전무후무한 로켓공학의 발전을 이루어 놓은 로켓공학의 아버지이다. 하지만 친위대 복무기록때문에 독일에서는 볼드모트취급을 받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도 그리 후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달탐사의 영광은 닐 암스트롱이 독차지 했다. 현대판 오딧세우스, 닐 암스트롱이 태양풍을 뚫고 칠흑같은 우주를 탐험하는데에는 브라운의 항해술, 즉 로켓공학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수 없다. 자신의 연구를 위해 악마와 거래했던 브라운은 과학의 가치중립적 성격과 윤리의식 사이에서 늘 도덕적 줄타기를 해야했던 한명의 나약한 인간이었다. 







"로켓의 성능은 완벽했다. 엉뚱한 행성에 떨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베르너 폰 브라운, V2로켓이 성공적으로 영국 본토를 타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