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도 없이 글이 묻히는 거 같아 재업 미안했어. 양해를 구해,)
(며칠 동안 노력해서 썼는데 묻히는게 너무 아쉬워)
(다섯번째 올리는거 같네. 너무 집요한가...어제 OCN에 300나오길레 생각나서.)
안녕
잘들 지냈니?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전쟁이야기를 마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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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페르시아의 서쪽 변방인 이오니아 지방에는
그리스계 도시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어.
그들은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있었지.
<이오니아는 오늘날 터키의 서쪽지방으로, 그리스에선 바다 건너 땅이었다.>
페르시아는 이들 도시에, 페르시아인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려 했는데,
자기 것을 빼았기기 싫었던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의
동포들을 믿고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해.
이오니아 반란 집압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는
이오니아 반란의 배후에 그리스 본토인들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대한 징벌과 그리스 정복을 위해 그리스 본토 도시국가들에 항복을 권고했어.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에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겁을 먹고 항복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투항권고를 ‘정중하게’ 거절해..
* 흙과 물은 영토 자체를 의미하며, 이를 바친다는 것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겠다는 것이다.
<우물 밑에 흙과 물이 얼마든지 있으니 내려가 직접 가져가시오.>
사신을 죽어버리는 무례에 분노한 페르시아는 먼저 가까운 아테네부터 응징하기로 했어.
아테네 정벌을 위해 3만의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인근 마라톤 해변에 상륙했지만
아테네군에게 패하여 원정은 실패했어. [전쟁사] 고대 그리스 중장보병과 마라톤 전투
1차 그리스 원정이 실패하고 얼마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는 사망했어.
이어서 보위에 오른 이는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야.
그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그리스 정복을 위해 200만의 대군을 일으켜 그리스를 침공해.
페르시아 대군에 대항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연합군을 결성했어.
그리스 육군은 좁은 협곡인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을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
그리스 육군은 남쪽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후퇴했어. [전쟁사] 스파르탄과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스군이 후퇴한 펠레폰네소스 반도는
입구가 좁은 지역이었기에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기에 좋은 조건이었지만,
페르시아군이 해군으로 좁은 지역을 우회한다면 방어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어.
* 병력이 적은 그리스군은 반도입구에 집중해야 하는 반면,
페르시아는 정면의 그리스군을 견제하는 동시에 해로를 통해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한편, 그리스 해군은 그리스 육군의 패전이후, 마찬가지로 남쪽으로 후퇴,
아테네 인근 살라미스섬에 주둔했고, 이후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함대를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에서 격퇴했어. [전쟁사] 3단 노선과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의 결과, 제해권을 상실하게된 페르시아군은
펠레폰네소스 반도 집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어.
본토를 너무 오래 비웠다는 부담때문에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원정군 30만을 그리스에 남기고 본국으로 귀환했지.
* 본국을 너무 오래 비웠다는 부담뿐만 아니라 그리스해군에 의해 해로가 차단되고
본토에서 그리스까지 설치한 배 다리까지 잃는다면 황제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부담도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이 승리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이제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갇혀있던 그리스군이
본토 수복을 위해 나올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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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황제가 본토로 귀환한 이후, 그리스에 남겨진 페르시아군은
별다른 군사행동 없이 그리스 동부 점령지에 머물렀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이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좁은 입구인 코린토스에
방어선을 완성한 이상, 육군 단독으로 이를 돌파하기 부담스러웠고,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제해권을 잃어 우회 상륙작전도 불가능한 상태였어.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성벽까지 완성되어 돌파하기 어려웠다.>
섣불리 펠레폰네소스 지역으로 공세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내부의 마찰로 분열되기를 기다렸어.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콩가루처럼 잘 뭉치지 못한 상태였어.
전쟁 시작도 전에 항복해서 페르시아에 붙은 도시도 있었고,
아직 항복은 안했지만, 간을 보고 있는 도시도 있었어.
또 이미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아테네 등 동부 그리스 세력과
아직 전쟁피해를 입지않은 스파르타 등 서부(펠레폰네소스) 지역의 입장도 달랐어.
<그리스 남부. 펠레폰네소스 지역과 그 외 지역의 입장이 달랐고, 반도 내에서도 사이가 안좋은 도시들이 많았다.>
아테네 세력은 어서빨리 그리스 동북부 지역을 수복하기를 원했던 반면
스파르타 등은 코린토스 수비에 집중해 자기 지역의 안전보장을 원했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아테네에 강화를 제안해.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해상기동을 차단하는 그리스 해군의 핵심 전력이었는데
만약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이기심에 지쳐 연합에서 이탈한다면
페르시아군은 해로를 통해 쉽게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
<아테네 함대는 살라미스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페르시아군의 상륙을 저지한 그리스 해군의 핵심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강화제안을 거절했지만, 동시에 다른 그리스 세력에게도 경고했어.
그리스 연합이 그리스 동북부 수복을 위해 펠레폰네소스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겠다고 말이지.
<아테네는 펠레폰네소스 도시들이 계속 이기적으로 나온다면 연합에서 이탈하겠다고 경고했다.>
아테네 함대가 연합해군에서 이탈한다면
펠레폰네소스 지역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파르타 등 펠레폰네소스 지역의 도시들은 즉시 아테네의 요구대로
군대를 일으켜 그리스 동북부 지역으로 출발했어..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은 플라타이아와 테페 근처지역에서 대치했다.>
그리스군이 진격하자, 페르시아군은 지형이점을 선점하기 위해 이동했어.
페르시아군은 자신들의 기병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페르시아에 투항한 도시인 테베시 인근 평원으로 이동했고
아소포스강 북쪽에 진영을 구축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축이었던 그리스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른 그리스 연합군을 기다리기 위해 아소포스강 남쪽 고지대에 진영을 구축했어.
<양군은 아소포스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고, 그리스군은 고지에 포진했다.>
페르시아군은 언덕위에 포진한 그리스군을 넓은 평야로 끌어내기 위해
기병대를 투입 치고빠지는 작전을 실시하려 했지만, 작전 초반에
기병대 지휘관이 전사하는 바람에 유인작전을 실패했어.
<그리스군을 고지에서 내리기 위한 페르시아 기병대 공격은 지휘관의 사망으로 실패했다.>
* 기병대라 하니 든든한 무장을 하고 적진을 돌파하는 충격기병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의 기병대는 적진을 돌파할 능력이 없었다. 말위에서 발을 걸쳐 몸을 지탱할 등자가 없었기에
기수는 말위에서 힘을 실어 창이나 칼을 휘두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기병은
말을 타고 적에게 접근해 투창을 던지고 빠지기를 반복하여 적을 괴롭히는 보조적인 병종이었다.
<당시 페르시아 기병. 접근전보다는 투창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 후 이탈 방식의 전투를 수행했다.>
* 당시의 말들은 체구가 작고 체력도 떨어졌기 때문에 기병의 중주장은 어려웠다.
말의 체구와 체력은 훗날 품종개량을 거리며 향상된다.
첫번째 교전 이후, 양군은 아소포스강을 사이에 두고 8일간 대치했어.
강을 건너는 취약한 시기에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피해가 크기 때문에
양군은 상대가 먼저 도하하기를 기다렸던 것이지.
양군이 대치하는 동안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병력들이 그리스군에 합류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군의 전력이 강해질 것이라 판단한 페르시아군은
기병대를 이용해 그리스군의 보급로를 타격하기로 했어.
특히 그리스군의 유일한 수자원 출처인 가르가피아 연못이 핵심목표였어.
* 페르시아군은 약 30만, 그리스군은 약 11만명이었다. 옛날 이야기니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자.
페르시아군의 차단작전 때문에 물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그리스군은 수자원 확보를 위해 기존 고지대 진지를 버리고
북서쪽으로 이동, 가르가피아 연못 북쪽에 진지를 구축해.
<아소포스강은 페르시아군의 궁병 사정거리 내였기에, 안정적인 물공급을 위해선 연못을 확보해야 했다.>
가르가피아 연못을 두고 양군은 대치했어.
페르시아군은 주력부대로 그리스군을 견제하는 동시에
기병대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그리스군의 보급로를 타격했고
마침내 수자원을 이용시킬 수 없도록 연못을 오염시키는데 성공해.
수자원을 이용할 수 없게되자
그리스군은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기로 했어.
그리스군은 주간에 이동할 경우 기습을 당할 것을 염려해
야간에 몰래 진지를 이동하기로 했어.
하지만 야간이동 과정에서 길을 잘못찾아 혼란에 빠진 그리스군은
집결하지 못하고 플라타이아 마을 근처에서 흩어진 상태에 빠져.
날이 밝은 후, 그리스군이 분리된 것을 파악한 페르시아 본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스군을 추격하기 시작했어.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 인근에서 급하게 진영을 재정비하고 이에 맞서.
중앙과 우측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다른 그리스 군대가 페르시아 본대와 싸웠고
좌측에 위치한 아테네군은, 그리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에 붙은 테베군과 싸웠어.
<페르시아군은 야간이동 중 실수로 분리된 그리스군을 공격한다. 진영이 분리된 헛점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우회해서 적의 취약한 측후면을 쑤시는 전술기동같은 것 없이
그리스군과 페르시아(+테베)군은 그대로 정면 충돌했어.
같은 무장과 전술로 붙은 아테네와 테베의 전투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지만
다른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전투에선 그리스군이 조금더 우세했어.
지난 이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페르시아 주력은 짧은 창과 가벼운 방패로 무장한 경보병이었던 반면,
그리스의 주력은 긴 창과 두꺼운 방패, 갑옷으로 무장한 중장보병이었어.
단순히 정면으로만 붙는다면 중보병이 경보병을 상대로 우세했던거야.
* 또한 페르시아는 대군이었지만 여러군데에서 징집한 병사로 구성되었지만
그리스군은 자원병이었기 때문에 훈련정도와 전투의지에서도 차이가 났다는 의견도 있다.
<좌 그리스 중보병, 우 페르시아 경보병. 무장수준의 차이가 크다.>
페르시아의 총 지휘관은 백마를 타고 용감히 앞장서서 싸우고 있었어.
그런데 한 그리스군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고
이 돌에 맞아 두부외상을 입은 페르시아 지휘관이 현장에서 죽어버려.
<용감한 페르시아 사령관은 불의의 일격을 맞고 즉사한다.>
* 이미지는 그냥 페르시아 고급 기병이다.
어이없게 지휘관이 죽어버리자 페르시아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그대로 무너져 도주하기 시작, 일방적으로 죽어나갔어.
*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군은 25만명이 죽었고 그리스군은 1000명 정도 죽었다고 한다.
양군의 진형이 충돌한 교전 중에는 큰 사상자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의
엄청난 사상자는 무질서하게 퇴각하면서 그리스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옛날이야기에서 선의 영웅성과 악의 병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전투는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어.
전투과정에서 지형 선점과 병력운영 등 모든 면에서 페르시아군이 더 훌륭했고
그리스군은 야간이동 과정에서 길을 잃는 등 병신짓을 했음에도
병력의 질적차이로 페르시아는 졌고, 그리스는 이겼어.
지난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과 같이
뛰어난 전술이나 영웅적인 투쟁없이 단순히 유닛빨로 이겼다는 이유때문인지
전쟁사 관련 매체에서 이 플라타이아전투는 별로 인기가 없어.
병력 개개인의 전투력이 승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교훈은 있지만 말야.
아무튼 플라타이아 전투의 결과, 페르시아군의 그리스 원정은 완전히 실패했어.
페르시아군은 본토로 철수했고, 그리스군은 부지런히 잔적을 섬멸하며 그들을 추격했어.
플라타이아 전투 이후에도 페르시아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어.
아테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동부세력인 델로스 동맹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있는 에게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규모 전투를 계속 이어나갔어.
결국 페르시아 전쟁은 30년을 더 이어가다 아테네와 페르시아 제국이
칼리아스 조약을 맺으면서 끝나.
* 이 30년 간의 전쟁기간이 역사적 비중이 적은 이유는 양측이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이지 않아서야.
페르시아는 자국 내 왕위다툼 때문에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그리스 델로스 동맹 역시 영토확장보다는
아테네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이용했을 뿐이었어.
<아테네를 중심으로한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지배권이었던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이오니아 등으로 진출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해.
이집트, 시리아 지역에서 제국의 통치력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제국은 다시는 그리스를 침공하지 못하고
훗날 오히려 그리스의 침공을 받는 처지가 돼.
그리스에서는 외부와의 전쟁이 끝나자
내부에서의 전쟁이 시작되려고 했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레폰네소스 동맹과
페르시아 전쟁 후반기에 세력을 결집한 아테네 중심 델로스 동맹이
대립하기 시작했거든.
이 대립이 훗날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불리우는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져.
<페르시아인이 물러간 후, 그리스인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플라타이아 전투는 재미도 교훈도 적은 전투여서 쓸까말까 고민하다
이야기 마무리를 위해 써보았어. 생각보다 글이 엄청나게 길어졌네.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맙고
다음에 펠레폰네소스 전쟁이야기로 돌아올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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